태블릿 필기 접고 다시 종이로 돌아온 이유
처음엔 분명 편했다
태블릿으로 필기를 시작했을 때는 세상이 정리된 느낌이었다.
노트는 무한했고, 페이지는 사라지지 않았고, 가방은 가벼워졌다.
그런데 기록은 쌓이는데, 이상하게도 기억은 남지 않았다.
필기는 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지나가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제는 태블릿이 아니었다.
기록을 대하는 나의 방식이 달라질 필요가 있었다.
종이로 돌아오자 필기량은 줄었고,
천천히 글씨를 채우는 동안 생각이 많아졌다.
지우지 못하는 흔적이 오히려 집중을 만들었다.
펜을 바꿔가며 쓰는 어려운 과정의 필기가 기억으로 남았다.
아마 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고민을 해봤을 것이다.
태블릿 기록이냐, 손으로 쓰는 기록이냐.
나 역시 그 질문 앞에서 태블릿을 선택했다.
알 수 없는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불렛저널 레이아웃을 그리다 실패하고
새 노트를 통째로 덮어두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기성 다이어리는 모든 페이지를 채워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었고,
종이에 남은 흔적은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반면 태블릿에서는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쓸 수 있었다.
때로는 키보드로 빠르게 입력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항상 깨끗한 결과물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너무 매혹적인 기록 방식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태블릿 필기가 점점 피로해졌나
손은 움직이는데 뇌는 쉬고 있었다
확대, 축소, 복사, 붙여 넣기. 태블릿의 필기는 너무 잘 도와준다.
문제는 그 친절함 때문에 생각이 깊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리는 자동이었지만, 이해는 늘 수동이었다.
언제든 수정할 수 있다는 장점은
동시에 완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트는 늘 열려 있었고, 생각은 계속 미뤄졌다.
과거의 기록을 다시 찾는 것에도 속도면에서 오히려 한계가 느껴졌다.
다시 종이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 순간
회의 중 메모를 다시 펼쳐봤다.
태블릿 화면 속 글자는 말끔했지만, 실체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대신 정리해 준 자료처럼 느껴졌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기록을 남긴 게 아니라 저장만 하고 있었다는 걸.
좌라락 넘기는 종이노트의 아날로그 손맛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종이 필기의 실제 장점
종이는 불편하다. 그래서 좋다.
- 배터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 화면 전환이 없어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 한 페이지 안에서 생각을 끝내게 만든다
종이는 생각에 마감 기한을 준다.
태블릿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다
태블릿은 여전히 쓴다.
PDF 주석, 자료 보관, 검색이 필요한 작업에는 최적이다.
특히 업무용으로 현장에서 바로 도면을 확인해 가며 쓰기에는 아주 적합하다.
다만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는 종이가 앞선다.
도구는 경쟁이 아니라 업무 분장이었다.
종이 필기로 정착하게 만든 문구 조합
노트 1 – 토모에리버의 A5 그리드 노트 (52g/㎡)
종이가 얇지만 잉크가 뒷면에 잘 배겨 나지 않는다.
5mm 그리드가 있어 불렛저널로의 활용이 좋다.
가격은 좀 높지만 (내 기준) 18개월을 사용할 수 있어 써볼 만했다.
토모에리버, 이름만으로도 종이 품질을 더 논할 이유가 없다. 최고다.
노트 2 - 트래블러스노트 패스포트 사이즈
예상 가능하지만 예전엔 보부상 가방이었는데 점차 가방의 무게를 줄이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2026년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 패스포트 사이즈이다.
리필노트는 89x124mm로 A7 크기와 비슷한 매우 아담한 사이즈이다.
나의 경우 오리지널 크기의 커버를 잘라 패스포트 사이즈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너무 작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알차게 내용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그건 페이지를 늘리면 해결되는 일이라 가볍게 기록을 시작하기에 참 괜찮은 사이즈인 것 같다.
지금 쓰고 있는 이 노트는 다음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루어 봐야겠다.

펜 1 – 유니 제트스트림 고급 4&1 멀티펜 (0.38)
내가 쓰는 것은 일본의 가구점인 karimoku와 협업으로 만든 제품으로
손에 잡히는 부분이 나무로 되어 있다.
나처럼 손이 작은 사람은 살짝 두꺼운 감이 있지만,
가볍게 하나의 필기구만 챙겨 나가야 한다면 고민하지 않고 이것을 준비한다.
리필심도 다양한 두께로 나와 있어 필요에 따라 고르면 되는데
수성과 유성의 중간 어디쯤의 느낌으로 색이 아주 선명하다.
초저마찰 전용 잉크를 썼다는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펜 2 – 카웨코 릴리풋 만년필 + 스모키 그레이 잉크
장시간 필기를 할 경우 사용하는 만년필로 펜의 크기가 매우 작아 작은 손에 적합하다.
잉크는 스모키 그레이 색상에 푹 빠져 이 두 조합으로 계속 쓰고 있다.
얼핏 보면 연필로 쓴 듯한 느낌을 줘서 아날로그 감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배경처럼 은근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이 색이 너무 좋다.
마무리하며
태블릿은 똑똑한 도구이다.
하지만 모든 생각을 맡기기엔 너무 앞서 있다.
종이는 아직 인간적인 편이다.
메모 하나쯤은 종이에 남겨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은, 손을 거쳐야 오래 남는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더 많이 하기보다,
끝까지 남기는 쪽을 선택했다.
요즘 내가 쓰는 노트는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오히려 작고, 불편하고,
언제든 가방에 넣을 수 있는 쪽에 가깝다.
그 노트 안에는 일정도, 메모도, 체크리스트도,
때로는 아무 의미 없는 낙서도 함께 들어 있다.
왜 굳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지금은
이 노트를 계속 쓰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조금 더 자세히 적어보려 한다.